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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히 말하는 도선지는 붓을 쥔 손을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정이현은 고통에 겨워

입에서 피를 토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믿었던 사람조차 자신을 버렸다는 것

에 대한 실망감이 전신을 누르고 있었다. 정이현은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도선지

의 소매를 잡아갔다. 이미 그의 몸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너…, 악…악적…, 죽을

……!!” 쿵! 도선지는 정이현이 쓰러지자 재빨리 그의 품속에서 얇은 책자를 꺼내 들었

다. 도선지는 빠른 동작으로 정이현의 시신을 뒤뜰에 감추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어

서 이곳을 떠야만 한다. 그가 무림맹의 추격을 받는다고 했으니 필히 올 것이다. 이곳

에서 가까운 형산으로 몸을 숨기자, 그리고 무공을 익혀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중얼

거린 도선지는 재빨리 여장을 챙기고 담장을 넘었다. 그가 있는 곳은 악록서원의 후원

이라 뒤의 담장을 넘자 악록산의 기이한 산세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후후후…, 정파에

서 말하는 도선지는 평소 선행을 통해 그 명성이 쌓였다 하던데 모두 거짓이로군, 친

구를 죽이는 솜씨를 보아하니 사파보다 더욱 사악한 놈이구나.” 도선지가 막 경공을

펼치려 할 때 왼쪽 숲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냐!””사람의

탐욕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더니 너를 두고 한 말이구나, 도선지야…! 도선지야, 네놈

은 친구를 죽였으니 곱게 죽기는 글렀다.” 도선지는 사방에서 한 목소리가 들리자 높

은 내공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았다. ‘육합전성(六合傳聲)을 이렇게 자유로이 구사하다

니…, 필경 내가 한 일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결코 살려둘 수 없다.’ “어느 방면의 고인

이기에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하하하…, 곤란할 건 뭐가 있느냐?

그냥 책을 내려놓고 가기만 하면 된다.” 도선지는 상대가 자신을 비웃으며 경천지보

를 내놓으라고 하자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최대한 말을 많이 시켜 상대의 위치를 파

악하기 위해서이다. “후후…, 책은 이미 내 손에 있소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그것을 가

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렇게 숨어서 말을 하는 사람은 대다수 도적이

거나 잡배일 터……!” “도선지야, 너도 참 어리석구나. 스스로 높은 학식을 가지고 있다

생각할지 모르나 나의 위치를 알아낸다 치자. 이곳에 나만 있다고 생각하느냐?” 미지

목소리에 도선지는 오른손에 모으던 기를 풀었다. 자신의 의도를 간파당했기 때문이

다. 그것보다 이곳에 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더 마음에 걸렸다. “나야 나서서

네놈을 죽이고 싶지만…, 워낙에 고인들이 많아 그러지 못하는 게 한이다.” “후후후

…! 흑혈노괴, 알기는 아는구나.” 도선지는 갑자기 들리는 다른 목소리에 긴장을 하

기 시작했다. 처음 목소리의 말처럼 이곳에 사람들이 꽤 있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자신의 무공으로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